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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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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small drawing was made by my grandson, who was majoring in electrical engineering, after my death.

 

아로의 할아버지

 

북한의 남포 출생인 나는 한국전쟁 중에 아내와 자녀들을 북한에 남겨두고 남한으로 탈출했습니다. 나와 함께 남한에 피난 온 아들은 남한 여성과 결혼해 손자를 낳았습니다. 나는 남한에서 태어난 첫 손자에게 Hyokab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Hyo의 뜻은 효도, Kab의 뜻은 첫째라는 뜻으로 그의 부모님에 대해 최고의 효도를 하는 자식이 되라는 뜻입니다. 효는 도덕의 중심입니다. 효를 잘하는 사람은 복을 받을 것입니다. 남한에서 얻은 첫 손자라 너무 귀했기에 나는 손자를 자주 데리고 다녔습니다. 특히, 나는 새집의 기초가 완공되는 곳에 가끔 초대되어서 술 한잔 마시고, 마룻대에 붓글씨를 써 주곤 했는데 손자는 그 모습을 차분히 바라보곤 했습니다. 

 

손자는 초등학교 때부터 내 방에서 잤습니다. 저녁식사도 같이 할 때가 많았습니다.  나는 매일 저녁식사와 같이 소주 한병씩을 마셨습니다. 내가 마시고 난 빈병은 모아두었다가 가게에서 손자가 과자와 바꿔 먹도록 했습니다. 연말이면, 북한에 두고 온 아내와 아이들 생각에 술을 더 많이 마셨습니다. 하루에 두세병을 마셨습니다. 그리고 손자에게 제가 북한에서 집을 떠났을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북한 집에서 남한으로 가기위해 대문밖으로 걸어나가는데 막내 아들이 나도 따라가고싶다고 했습니다. 나는 약간의 망설임 끝에 아들에게 말하길 전쟁이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전쟁이 끝나면 바로 돌아올 것이다. 그러니 집에서 어머니를 힘들지 않게 잘 모시라고 말했습니다. 아들은 그렇게 하겠다고했고 그게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그 막내 아들의 모습이 자주 생각이 납니다. 한번 더 따라가겠다고 했다면 같이 남한에 왔을텐데하며 두고두고 후회 되었습니다. 나는 매년 연말이면 술에 취해 똑같은 이야기를  손자에게 들려주었습니다. 그는 듣기만 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손자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그림일기를 그렸습니다. 하루는 퇴근하여 집에 들어오는 아들이 그에게 인사를 안하고 그림일기에만 집중하는 손자를 예의가 없다고 야단쳤습니다. 그는 더 이상 그림일기를 그리지 않았습니다.. 아들은 손자를 엄하게 키웠습니다. 손자는  때때로 혼내려는 아빠를 피해 내 방으로 도망쳐 오기도 했습니다. 그 때면 아들은 내방 유리창으로 손자를 노려보기도 했지만, 내 방에는 절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아들은 남한에서 금지된 북한 라디오 방송을 몰래 듣곤 했습니다. 아들도 북한이 그리운 것입니다. 만화를 많이 보는 손자는 아빠가 스파이가 아닌가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며느리는 남한 여자로 아주 선량하여 교회를 다니며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일을 많이했습니다. 손자는 그의 어머니와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 다녔습니다. 그는 중학생이 된 이후 신의 존재에 대해서 많이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이 설교중 말하길 강단의 의자 중에 중앙에 자리는 하나님의 자리라고 했습니다. 그 자리는 항상 비워있었습니다. 손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중앙에 앉아 계신다는 말을 믿고 싶었습니다. 아무도 없을 시간에 교회 강단으로 갔습니다. 그는 가만히 중앙의자를 지켜보았습니다. 처음으로 단상에 올라갔습니다. 목숨을 걸고 가운데 의자에 앉았습니다. 아무일도 안 일어났고 달려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손자가 중학생이 되었습니다. 그의 학교는 집에서 멀었습니다. 하지만 손자는 새벽5시에 일어나 친구들과 같이 일찍 학교로 향했습니다. 그는 매일 아침 국립묘지안 산 기슭에 있는 절 주변에서 놀다가 학교에 등교했습니다. 국립묘지에는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17만명이 넘는 군인들이 묻혀있습니다.

산 기슭에서 내려다보면 하얀 묘비들이 줄 맞추어 서 있었습니다. 손자는 친구들과 동물을 쫓아다니거나 나무에 오르거나 홍콩무술영화 흉내내며 놀곤 했습니다. 손자와 친구들은 때로는 소란스럽게 굴다가 절에 있는 중들한테 쫓겨 도망치기도 했습니다.  손자는 학교에서는 친구들에게 초상화를 그려주거나 축구선수 공차는 모습을 그리기를 좋아했습니다.

고등학생이 된 후에 손자는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반항하였습니다. 때리려는 아버지 팔을 붙잡아 밀고, 밖으로 도망쳤습니다. 어느 트럭 밑에 숨어있다가 그의 아버지가 지나간 후에 친구의 자취방으로 달려 도망갔습니다. 

그는 친구의 방에서 둘이 생활했습니다. 그 당시 모든 고등학교는 군사훈련 수업이 있었습니다. 군인복장을 한 교련 교사는 학생들을 체벌을 하면서 통제 하였습니다. 손자는 그 교사를 마주치기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학교 담을 자주 넘어다녔습니다. 그 교사는 학교 주변도 돌아다니며 학생들을 통제하였습니다. 어느 날은 만화가게에 들이닥쳤습니다. 손자와 친구들은 그를 피해 first floor로 올라가서 ground floor로 뛰어내려 도망가기도 했습니다.

 

손자는 집을 나온뒤로는 저녁에 동네 사설도서실에 자주 갔습니다. 도서실에서 공부를 하다가 밤이되면 도서실 옥상에서 대학생들이 술 마시며 토론하는 자리에 있었지만 전혀 생각해 보지못한 주제에 듣기만 했습니다.  그들은 정치를 말하고 나라에 대통령 욕을 하고 민주주의, 사회주의를 말하고, 인생과 미래를 말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책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자본론등의 책은 지루했습니다. 하지만, 실존주의 책은 참 재미있었습니다. 그는 사람구경을 좋아했습니다. 손자는 토론을 안하고 항상 듣기만하며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내 손자는 대학 입시 합격결과를 집에 들어가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감격해서 미국 담배 ”more”를 손자에게 주었습니다. 그는 Boston의 명곡 more than a feeling을 아직도 좋아합니다. 대학 다니면서 1년간 틈틈히 까르띠에 하청 공장에서 디자인 일을 했습니다.  그는 공장에 걸려있는 Raoul dufy의 그림이 있는 달력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경계가 없이 달리는 선과 색, 그림은 자유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언제가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대학 생활 중에 남학생은 일주일간 병영 군사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손자는 친구들과 같이하니 힘들지만 재미있게 지냈습니다.. 밤 10시 점호시간에 장교가 화장실을 점검합니다. 누가 잘 청소한 화장실에 단단한 똥을 싸놨습니다. 장교는 그 똥을 손으로 들어 내어 청소 담당 학생에게 주었습니다.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나는, 내가 오래 살면 통일이 되고, 고향에 돌아가 막내 아들과 식구를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남한 피난와서 24년을 기다렸지만 90세가 되어도 고향에 못 가고 죽을 때가 되었습니다. 내가 위독함을 알고 오랜만에 집에 들어온 손자는 거동 불가능한 나를 내려다보았습니다. 그에게 나는 엄지손가락을 치켜보여주었습니다. 손자는 울지 않았습니다. 그는 내 죽은 시체 염을 할 때도 방문에 있는 유리창으로 끝까지 지켜보았습니다. 죽은 나를 지켜보는 손자의 뒷모습을 나는 지켜보았습니다. 손자는 내 영정사진을 들고 장례식에 앞장서서 걸어나갔고,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울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만 며칠 후  A4용지에 내가 손자를 안고 있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여름방학기간 전국여행을 떠났습니다.

여행 기간, 손자는 여자를 만났습니다. 별빛이 가득한 밤, 농촌의 큰 나무 밑에서 여자와 단 둘이 대화를 했습니다. 그는 그녀에게 40일간의 여행 중에 여행엽서를 보냈습니다. 그리나, 군대 입대 영장이 왔습니다. 

 일주일 간의 송별 파티 후, 그는 군대에 입대 했습니다. 머리를 삭발하고, 고되고 무서운 훈련소 생활을 했습니다. 어느 날 밤, 일어나 잠결에 눈을 감다싶이하고 화장실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큰 충격이 얼굴을 때리고 그대로 손자는 나가 떨어졌습니다. 쓰러진 그의 머리위로 욕이 들려왔습니다.  한 장교가 경례를 하지않는 손자의 안면을 가격했던 것입니다. 그는 어렴풋이 보이는 장교를 향해 경례를 했습니다. 소변을 보고 자리로 돌아와 엎드려 억울한 마음에 눈물을 쏟으며 바로 잠이 들었습니다. 그 후로 손자는 눈물을 안 흘립니다. 손자는 강한 군대를 만들고 싶어하는 그 장교를 이해했습니다.

 

그는 DMZ와 가까운 전방으로 배치되어 통신병으로 군대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부대원중 몇 몇 군인이 사고로 죽었습니다. 같은 소대 전차정비중사는 장갑차를 몰다가 탱크 포신에 부딪히며 머리가 부서져 죽었습니다. 장례식을 치르기위해 나의 손자는 그 시체를 알코올로 씻었습니다. 장례식 때마다 영결식장 현판에 큰 글자를 손자가 썼습니다.

 군 생활 중 대통령 암살 사건이 일어나 비상경계 들어갔습니다. 군인들은 전쟁이 시작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손자는 탄약을 실은 장갑차에 올라타 죽으러 북한에 갈 각오를 했습니다. 

갑자기 한 군인이 새 대통령이 되고 훈련은 더 강해졌습니다. 

군단 내 문화활동 프로그램이 새로 생겼으나 바쁘고 고된 훈련으로 아무도 참가 할 수 없었습니다. 나의 손자는 상관의 지시로 다른 사람 대신 많은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혼자서 잠도 거르면서 여러 시도 쓰고, 그림도 그렸습니다. 부대가 작곡 작사도 했습니다. 그 많은 작품에 다른 부대원들의 이름을 붙여서 출품했습니다. 군대가 하라고하면 하는 것입니다. 손자는 그가 작사 작곡한 군 부대가는 아직도 부대에서 불려지는지 궁금해 하였습니다. 제대 후, 손자는 중학교때 놀이터 였던 국립묘지에 죽은 부사관의 묘를 찾아갔습니다.

 

 

대학에 다시 돌아 온 손자는 좋은 회사에 취직하기위해 매일 밤 늦도록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휴식시간이면 도서관의 유명화가의 도록의 많은 그림을 보았습니다. 아마도, 도서관의 대부분의 도록을 보았을 것입니다. 전공 과목인 전기공학의 많은 공식이 미술로 보이기도 했습니다. 맥스웰 방정식이 아름다워보였습니다.

 

손자는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했습니다. 결혼도 했습니다. 그는 우연히 한국에서 전시회를 하는 토론토 대학 미술교수를 만나서 이민과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손자는 캐나다 대신 뉴질랜드를 선택했습니다. 그는 뉴질랜드로 이민와서 visual communications를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왜, 뉴질랜드에 왔는가를 생각합니다. 손자는 한국에서 뉴질랜드로 온 것이 탈출이라는 생각을 합니다.그는 그림 그리기 위해서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튼,.탈출은 그에게 도전이고, 새 삶입니다. 졸업작품으로 탈출을 주제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몸 속의 정자가 탈출해서 난자를 만나 새로운 결과를 만듭니다. 배터리(신)의 전기가 스위치(남자)를 켜면서 전등(여자)에 불이 들어오게합니다. 

폴리텍을 졸업즈음에 한국에 IMF 경제위기가 일어났기때문에, 나의 손자는 한국에 돌아가서 취직을 합니다. .그는 한국에서 디자인 일도 하고, 대학에 강의도 했습니다.  첫 개인전시회를 하고, 큐레이터와 같이 중국에 갔습니다. 손자는 베이징에서 열린 옥션장가서 많은 그림들이 팔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싱가포르 옥션에 참가도 합니다. 중국에서 베이징, 상하이, 청두에서 전시회를 했습니다. 손자의 그림은 스튜디오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스타일의 그림으로 실험을 했습니다. 그는 약 2년간 그림을 그만두고 병든 부모를 돌보았습니다. 부모가 죽은 후 그는 뉴질랜드로 다시 오게되었습니다. 그의 부모님이 떠났으므로, Hyokab이란 이름은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는 “Aro”라는 이름을 만듭니다. “A”는 나자신, “ro”는 길이란 뜻입니다. 이제 아로는 그의 길로 갑니다. 그는 그림그리는 것이 그의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림에 몰두하면서 그가 꼭 해야 할 일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손자는 할아버지의 고향 남포로 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북한 남포에  꼭 갈 것입니다. 그래야 그의 인생의 그림이 완성이 됩니다. 아로는 나의 염원을 이룰 것입니다. 그 손자는 -ism을 싫어합니다. 프레임을 싫어합니다. 경계를 싫어합니다. 사회주의는 무엇인가, 자본주의는 무엇인가. 다 필요없다. 내가 살던 곳으로 나는 돌아간다. 담을 헐어라. 프레임을 깨라. 나는 죽었지만, 나는 고향에 간다. 도망을 끝내고 손자와 같이 갑니다. 

 

Aro’s portfolio by Aro

나의 할아버지는 한일병합 전에 태어나셔서 한국이 해방 되는 것을 보시었다. 이후,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전쟁중에 북한에서 탈출해서 남한에서 살다가 돌아가셨다. 남한에 사시는 동안 통일이 되어 북한에 돌아가기 만을 기다리며 사셨다.나의 아버지도 북한을 그리워 하셨다. 하지만, 그 분들은 돌아가셨다. 그 분들은 완전한 자유를 찾은 것이다. 가족이란 프레임에서 벗어나신 것이다. 나는 그들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다. 울타리, 휴전선, DMZ, 밤과 낮을 만든다. 나는 북한에 안간다. 그냥 남북한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바라 볼 것이다. 나는 죽기전에 이미 프레임 밖에 있다. 예수가 붓다를 사랑하는 것처럼 자유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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